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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한 잔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세상에서, 나는 정말 '내가' 선택하고 있는가?

오늘 뭐 볼지 넷플릭스에게 물어본 적 있나요?

퇴근 후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켠다. "오늘은 뭘 볼까?"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첫 화면에 뜬 '오늘의 추천'을 클릭한다.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앱을 열면 홈 화면에 영상들이 쭉 나열되어 있고, 우리는 그중 하나를 고른다. 틱톡은 아예 고민할 틈도 주지 않는다. 앱을 열자마자 영상이 자동 재생되고, 마음에 안 들면 스와이프하면 그만이다. 어느새 2시간이 지나 있다.

이런 경험은 이제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 발짝 물러서 생각해보면 묘한 의문이 든다. 나는 방금 무엇을 '선택'한 걸까? 내가 보고 싶었던 걸 본 걸까, 아니면 알고리즘이 보여주고 싶었던 걸 본 걸까?

넷플릭스 시청의 약 80%는 추천 알고리즘에서 시작된다. 유튜브 시청 시간의 70% 이상이 추천 영상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무한한 콘텐츠의 바다에 살고 있지만, 실제로 접하는 것은 알고리즘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극히 일부분이다.

넷플릭스 앞의 사람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다

사르트르 철학의 출발점은 유명한 명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이다.

가위를 생각해보자. 가위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자르는 도구'라는 목적이 정해져 있다. 설계도가 먼저 있고, 그에 맞춰 가위가 만들어진다. 본질이 실존보다 앞서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라"라는 설계도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다. 태어날 때 정해진 운명, 고정된 본성 같은 건 없다. 우리는 그저 먼저 존재하고, 그 이후에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만들어간다.

선택은 불안하다, 그게 정상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 앞에서 느끼는 감정을 **'불안(angoisse)'**이라고 불렀다. 이 불안은 병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라면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다.

대학교 전공을 선택할 때, 취업할 회사를 고를 때, 심지어 오늘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우리는 미세한 불안을 느낀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 불안함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자유롭다는 증거다. 만약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핑계는 자기기만이다

그런데 이 불안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 우리는 종종 핑계를 찾는다. "원래 내 성격이 그래서", "환경이 어쩔 수 없었어", "다들 그렇게 하니까" 같은 말들이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 자기기만이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외면하고, 마치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파리 카페의 사르트르


알고리즘은 어떻게 '나'를 파악하는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쌓이는 데이터

넷플릭스는 어떤 영상을 클릭했는지뿐 아니라, 몇 초 만에 껐는지, 어느 장면에서 일시정지했는지, 몇 시에 주로 시청하는지까지 파악한다. 틱톡은 더 극단적이어서, 어떤 영상에서 스크롤을 멈추고 0.5초라도 머물렀는지를 0.1초 단위로 분석한다.

취향 프로필의 탄생

이렇게 모인 데이터는 '취향 프로필'을 만든다.

"이 사용자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고, 2시간 이상 영화는 잘 안 보며, 주로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시청하고, 한국 배우 A가 나오는 작품에 반응한다."

여기에 '협업 필터링'이 더해진다. 나와 비슷한 시청 패턴을 가진 사용자들이 좋아한 콘텐츠를 추천하는 방식이다. 이 프로필은 수백, 수천 개의 변수로 이루어져 있고, 계속 업데이트된다.

목표는 '참여 시간 극대화'

중요한 것은 알고리즘의 목표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에게 좋은 콘텐츠"가 아니라 "사용자가 계속 보게 될 콘텐츠"를 추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미 좋아하는 것, 이미 익숙한 것, 거부감 없이 바로 클릭할 것을 보여주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알고리즘이 대신 골라주면 뭐가 문제인가?

문제 1: "넌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정해버린다

사르트르의 핵심 주장을 다시 떠올려보자. 인간에게는 고정된 본질이 없고,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그런데 알고리즘은 정반대의 논리로 작동한다.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당신은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그에 맞는 콘텐츠만 보여준다.

로맨스 영화를 몇 편 봤더니 끝없이 로맨스만 추천된다. 한번 정치 뉴스를 클릭했더니 비슷한 성향의 뉴스만 피드에 뜬다. 새로운 장르, 낯선 관점, 예상치 못한 발견의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사르트르라면 이것을 일종의 **"본질의 강요"**라고 봤을 것이다.

문제 2: 선택의 고민이 사라지면, 자유도 사라진다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은 바로 이 불안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뭘 볼지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가 골라드릴게요."

이 편안함은 분명 유혹적이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자유의 무게를 회피하는 것이다. 추천받은 것을 볼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선택의 책임을 알고리즘에게 떠넘기고 있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문제 3: 아무도 강요 안 했는데 왜 우리는 따르는가

가장 미묘하고 중요한 문제다. 누구도 우리에게 추천 영상만 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검색창은 항상 열려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부분 추천을 따른다.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다. 편리하니까, 알고리즘이 더 잘 아니까. 하지만 이 합리성 뒤에는 "선택의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숨어 있다. 자유로운 존재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역설적 상황이다.

콘텐츠 미로 속의 사람


"그래도 최종 클릭은 내가 하잖아?"

당연한 반론이다. 알고리즘은 강제하지 않는다. 제안할 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식당에 갔는데 메뉴판에 파스타, 피자, 스테이크만 있다면, 당신은 이 셋 중에서 고를 것이다. 메뉴판에 없는 태국 음식이나 인도 커리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다.

알고리즘 추천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 첫 화면에 뜨지 않는 영화는 우리의 고려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된다. 선택지의 구성 자체가 이미 선택을 방향 짓고 있는 것이다.

💡 실험해보기: 일주일 동안 유튜브 홈 화면 추천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검색만으로 영상을 찾아보세요. 평소와 전혀 다른 콘텐츠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알고리즘 시대에 '진짜 내 선택'을 하려면

알고리즘을 끄고 살 수는 없다. 그것은 현대 디지털 환경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자각이다. 사르트르가 강조한 것은 선택 자체보다 선택에 대한 의식이다.

"지금 이 선택,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추천받았기 때문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수동적 소비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작은 저항의 방법들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 때로는 추천 목록 맨 아래까지 스크롤해보기
  • 전혀 안 보던 장르를 일부러 클릭해보기
  • 검색창에 평소 관심 없던 키워드를 넣어보기

이런 작은 행동들이 알고리즘이 만든 "나의 취향"이라는 틀을 조금씩 깨뜨린다. 알고리즘에게 예측 불가능한 사용자가 되는 것, 이것이 디지털 시대의 소소한 자유 실천일 수 있다.

화면을 뚫고 나오는 손


사르트르의 자유는 편한 자유가 아니다. 고민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고, 때로는 불안하다. 알고리즘 추천은 이 불편함을 제거해주겠다고 유혹한다. 하지만 그 편안함의 대가는 자유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일 수 있다.

수많은 작은 선택들이 쌓여서 우리의 세계관을, 취향을, 결국 우리 자신을 형성한다. 기술이 선택을 대신해주는 시대일수록, "왜 이것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다.


참고문헌: 사르트르 「존재와 무」(194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 쇼샤나 주보프 「감시 자본주의 시대」(2019)